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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오디오랩> 크로이처(Kreutzer), 위대한 예술가들이 작품으로 남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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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빈낙도 댓글 0건 조회 413회 작성일 21-07-0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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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 호사유피 인사유명).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고사 성어이다. 좋은 일을 하여 이름을 후세에 남긴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름 남길 생각은 전혀 없이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다 갔는데 자기 의도와는 달리 이름이 영원히 남게 된 사람이 있다. 그것도 무려 여러 명의 위대한 예술가들에 의해.

1800년 전후, 프랑스에 루돌프 크로이처(1766~1831)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당대에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악성 베토벤(1770~1827),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1828~1910), 20세기 체코의 유명한 작곡가 야나체크(1854~1928)가 차례로 그의 이름을 남겼으니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

1803년 5월, 베토벤은 자신의 아홉 번째 바이올린 소나타를 쫓기듯이 완성했다. 그리고 5월 24일 아침 8시 베토벤 자신의 피아노와 영국 바이올리니스트 조지 브리지타워(1778~1860)와의 협연으로 초연했다.

아프리카계 흑백 혼혈 영국인인 브리지타워는 당대에 거장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했던 사람으로 그의 연주는 베토벤의 창작열을 자극했을 정도로 놀랄만하였다. 1994년에 제작된 베토벤의 여인에 관한 영화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 게리 올드만 주연)'에서 베토벤이 보는 앞에서 브리지타워가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을 연습하는 장면일 정도로 베토벤은 그의 연주에 흠뻑 빠져 있었다.

1803년 4월, 비엔나를 방문한 브리지타워는 베토벤을 소개받았다. 베토벤은 당시 25살의 젊은 그의 연주에 감명을 받아 함께 연주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그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하였다. 연주회 일정에 쫓긴 베토벤은 3악장을 그가 이전에 작곡했던 소나타에서 빌려왔고 여기에 맞추어 1,2악장을 새로 작곡하여 완성하였다. 얼마나 일정에 쫓겼던지 브리지타워는 공연 전날에서야 베토벤이 보낸 새로운 악장의 악보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작곡 과정에서 베토벤은 일부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악보에 반영하는 등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성공적으로 연주를 마친 후 베토벤은 브리지타워에게 소나타를 헌정하였고 튜닝 포크(tuning fork)를 기념으로 선물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기분 좋게 술을 마시다가 브리지타워가 베토벤이 흠모하는 여인의 도덕성을 비난하게 되었고 이에 격분한 베토벤은 당초 브리지타워에게 헌정했던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을 취소하고 절연한다. 이후 둘은 평생 만나지 않았다.

튜닝 포크

브리지타워는 말년을 런던의 빈민촌에서 보냈는데 베토벤을 연구하던 한 학자가 그를 방문하여 그가 베토벤을 만난 적이 있었는지 사실 여부를 질의하였다. 브리지타워는 앞서 언급했던 전말을 소상히 전하였고 베토벤으로부터 헌정 받았던 9번 바이올린소나타를 취소당하였던 일을 가장 후회했다고 한다.*1

*1) Beethoven's friends and patrons, George Bridgetower, www.madaboutbeethoven.com

베토벤은 마음을 바꾸어 1805년, 프랑스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크로이처에게 헌정한다. 악보를 읽은 크로이처는 이미 연주된 적이 있고 연주가 너무 어렵다 하며 공개적으로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크로이처 소나타 초판 표지

베토벤에게 헌정 받은 크로이처에겐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베토벤에 대한 평가도 그리 높지 않았고 더구나 다른 바이올리니스트가 이미 초연했던 곡을 헌정 받는 게 불쾌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베토벤의 소나타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그를 기억해 줄 사람이 없었을 것이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세월이 흘러 1889년 61세의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크로이처 소나타>라는 중편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영감을 받아쓴 것으로 베토벤이 그렸던 1악장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격정적인 연주로 긴장감을 극대화하듯 일인칭 '화자'인 주인공을 통하여 톨스토이의 사랑관, 여성관, 결혼관을 강력히 드러낸 화제작으로 이미 죽은 '크로이처'를 다시 불러내었다.

1923년 야나체크가 작곡한 현악사중주 제1번은 톨스토이의 소설에 영향을 받아 작곡한 것으로 그의 악보에는 "톨스토이 '크로이처 소나타'에 영감을 받아"라고 쓰여있다. 이런 이유로 이곡을 '크로이처 소나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각 악장은 톨스토이의 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작곡된 야나체크의 '표현주의'적 정수가 담긴 명곡이다.

루돌프 크로이처, 그렇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갖은 수단을 쓰는데 운명의 반전 속에 원치 않게 그의 이름은 인류 역사의 위대한 예술가들을 통해 음악과 문학, 그림, 시를 통하여 많은 작품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축복일까, 저주일까...

만일 브리지타워가 베토벤의 여인을 비난하지 않았더라면 <크로이처 소나타> 대신 <브리지타워 소나타>가 되었을 것이고 그의 이름이 영원히 남았을 텐데 한순간의 실수로 엄청난 영예는 날아가 버리고 쓸쓸히 사라졌으니 이 또한 운명의 저주일까?

영화, 불멸의 연인, 조지 브리지타워의 등장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Op.47 크로이처, 안네 소피 무터 바이올린, 램버드 오르키스 조하리 피아노

https://youtu.be/COGcCBJAC6I

야나체크, 현악사중주 1번 크로이처 소나타, 멕코어 현악사중주단

https://youtu.be/rmOH_myNY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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